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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아름다운 동행]순교의 신앙으로 살아낸 어느 ‘거인’의 생애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0-08-10 조회수 5347
07 ▶기독교 절제운동의 어머니 ‘여귀옥 권사’

여귀옥 권사는 1923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대성그룹 총수의 부인으로, 영락교회의 권사로, 대한기독교절제회의 대표로 평생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2006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아버지가 입다 만 낡은 속옷을 입으셨고, 나중에는 시장에서 천을 사다가 직접 만들어서 입었으니까요. 이런 건 괜찮은데 제가 사업을 할 때도 어머니는 수영복까지 마치 흥부 수영복처럼 여기저기 꿰매어서 입고 다니셨죠.


어머니로부터 신앙을 받다

“하나님, 제 머리맡에 약탕관을 두지 않고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순교하게 해 주십시오.”
열세 살이었던 소녀 여귀옥은 그렇게 기도하였다. 그 푸른 나이에 순교의 신앙을 갖고자 소망하였다.

어머니 최성연 권사의 신앙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은 딸이었다.
여귀옥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기차로 열한 시간 거리의 평양여자신학교로 갔다. 학교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폐쇄된 뒤였다.
다시 대구로 내려왔을 때 혼처가 나왔다. 딸을 앞에 두고 어머니는 다짐을 하였다.
“내가 딸이 둘이면 하나는 부잣집에 보내고, 하나는 인격을 보아 보낼 테지만 단 하나뿐이니 인격을 보고 보낼 수밖에 없구나.”

약혼자 김수근은 어머니가 가르치는 성경공부반에 출석하던 동생뻘 되는 이의 아들이었다. 겸손하고 참하였으므로 어머니는 김수근을 마음에 담아두었다. 그 집은 가난하여 때로 어머니의 도움이 필요하였다.

약혼을 한 뒤 어머니는 사위를 일본에 유학 보냈다. 유학 중에 김수근은 병을 사경에 빠졌다. 그런 남자에게 딸을 보내야 할 어머니의 마음은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한 가문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였다.
“얘야, 하나님 앞에서 한 약혼인데 몸이 약해졌다고 어길 수는 없다. 가서 아들 하나만 낳아라. 그러면 네가 이 세상에 온 보람이 있을 게다.”

가난하고 외로운 신혼살림살이였다.
“하나님, 보디발의 집에 팔려온 요셉처럼 외롭습니다. 온 문중이 예수님을 모르니 요셉과 함께한 하나님께서 어찌하든 저와 함께해 주십시오.”
여귀옥은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 신장염을 앓는 시어머니의 대소변을 1년 꼬박 받아냈다. 그러나 예수 잘 믿는 며느리의 얼굴에선 어둠이 없었다. 기꺼이 효도하는 며느리를 향하여 시어머니는 복을 빌었다.


지혜로운 기업가의 아내

남편 김수근은 해방 이후 사업을 시작하였다. 남편은 지혜로운 아내와 자주 대화하였고, 아내의 지혜를 마음에 담았다. ‘대성’이란 명칭도 아내의 지혜였다.
기업가의 아내로서 여귀옥은 집 안의 화목을 강조하였다. 방법은 신앙이었다. 남편은 낮에도 집에 와서 점심식사를 했다. 집에 온 남편은 언제나 행복해 하였다. 남편이 사기를 당하여 전 재산을 잃고 낙담할 때도 아내는 남편에게 “밤에 도적이 들었다고 생각하고 잊으세요” 하였다.

그러나 남편의 길이 옳지 않다, 판단하였을 때 여귀옥은 추상같았다. 전쟁 후 사업할 것이 없을 때 남편은 주류업에 손을 대고자 아내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때 여귀옥은 단호하게 말하였다.
“당신이 사업한다고 술을 판다면 나는 이 집에서 나가겠습니다.”

여귀옥은 어느 날 같은 교회에서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젊은 부인으로부터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었다. 부인의 남편이 칠판을 만드는 기술이 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고 있었다. 모르면 모를까 알면서도 도울 수 있는 일을 회피하는 일이 없던 여귀옥은 남편을 찾아가 제안했다.
“여보, 칠판공장을 하나 열면 안 될까요?”
남편도 허락하여 연탄공장 한쪽에 칠판공장을 열었다. 어찌 보면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었을 텐데, 여귀옥은 순종하였다.

칠판을 만들어 창고에 쌓아두었을 때 전쟁이 났고, 창고 문을 잠궈 둔 채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수복 후 돌아와 보니 창고의 칠판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학교마다 칠판이 필요할 때 유일하게 물품을 댈 수 있었다. 칠판을 팔아 남긴 돈이 훗날 대성그룹의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다.
세상일은 언제나 그러하였다.

둘째 김정주 교수(연세대)는 이런 교훈을 평생 마음에 새기며 살았다고 한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삽니다. 우리는 모르지요. 대성연탄도 그랬습니다. 아버지가 구공탄을 찍고 있을 때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이 삼림녹화를 강조하여 벌목을 금하였으므로, 땔감이 없어지자 자연스럽게 연탄 수요가 늘었던 것이지요. 대성연탄이 성장하게 된 계기는 바로 그것입니다.”
대성그룹은 연료 계통의 사업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프로판가스, 석유사업, 도시가스 등을 인수하였고, 마침내 재계 서열 10위권에 오르기까지 했다.


절제운동의 ‘어머니’로 살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 앞에서 순교하려고 기도했는데 어찌 안락한 가정부인으로 안주하고 있습니까?”
여귀옥은 목말라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도둑이 들었고, 밤새 집안은 텅 비어버렸다.
남편도 없던 그날 아침 여귀옥은 아이들 앞에서 말했다.
“우리 집은 아버지가 사업을 잘하시고 엄마는 신앙생활을 잘하니 너희들이 지상낙원에서 사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느냐. 그러나 지난밤에 물건을 가져간 그 사람은 얼마나 가난하기에 이런 일을 했겠느냐? 누가 이런 사람들을 구할 수 있겠느냐?”
“우리가 그 일을 하겠습니다.”
“그러냐? 그러면 우리는 잃은 것보다 얻은 게 많다.”

여귀옥은 아이들과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마가의 다락방 같았다고 여귀옥 권사는 간증하였다.
그때 이웃 사는 박 집사란 친구가 소문을 듣고 양치를 하다 말고 바가지까지 든 채 위로하러 들어왔다가 감사하는 여귀옥을 보면서 함께 은혜를 받고 바가지를 머리에 얹은 채 춤을 추었다.
박 집사는 “이렇게 되어서 감사하는 신앙을 보다니, 오늘처럼 기쁜 날은 처음이야” 하였다.
여귀옥은 그 자리에서 박 집사를 설득하였다.
“우리 같은 사람이 문을 닫고 사니 결국 사람들이 밤에 몰래 와서 가져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제 우리가 주머니를 풀고 선한 일을 합시다.”

이렇게 시작한 구제의 일을 바울과 바나바처럼 40년 동안 박 집사와 함께 했다.
먼저 다리 밑에서 살던 고아들을 품었다. 전쟁 후라 고아들이 넘쳐났다. 초등학교만 졸업하면 고아원에서 내보냈고, 그들은 다리 밑에서 살며 구두닦이를 하든가 도둑질을 하였다. 그들을 위해 학교를 세우고, 장학금을 주었으며, 예배를 드렸다. 교도소를 찾아가 양식을 나누고 예배를 드렸다. 순수했던 아이들은 변하였고, 그들 가운데 많은 수가 독립하여 내로라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러면서 여귀옥 권사는 기독교여자절제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금주와 금연을 폐가망국의 원인으로 보았으므로 그 일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서울에 이사 온 뒤로는 서울에서도 그 일을 계속하였다. 서울역 앞에 작은 공간을 만들었고, 시골에서 서울로 온 여성들이 윤락녀로 빠지는 것을 막느라 애를 썼다.
여귀옥 권사는 남편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회운동에 나섰다. 그러니 생활비를 아껴야 했고, 시간을 아껴야 했다. 그렇게 절제하며 대구와 서울의 절제회관을 건축하였다. 여귀옥 권사에게 그것은 곧 순교의 삶을 살아내는 일이었다.


삶으로 지켜낸 ‘순교신앙’

서울의 절제회관을 건축하기 위해 여귀옥 권사는 더욱 검소하게 살아야 했다. 그때의 일을 남매들은 잊지 못한다.
둘째 김정주 교수는 그때를 이렇게 기억하였다.
“계란 하나 제대로 못 먹었습니다. 여성이 건축을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요. 아버지 몰래 하셨으므로 더욱 힘들었습니다. 생일에도 우리는 미역국 한 그릇이 전부였습니다. 어머니는 ‘우리는 매일 생일이다’라며 생일선물을 하나님께 바치자, 하셨습니다.”

셋째 김성주 대표(성주그룹)도 그 기억이 또렷하였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주신 돈으로 이웃을 돕는 데 섰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좋은 옷을 입힐 수 없었지요. 우리는 늘 시장물건을 샀고, 사더라도 큰 옷을 사서 오래 입도록 하였습니다. 신발도 다 떨어지면 바꿔주었죠. 저는 막내였으므로 언니들의 옷을 물려받았죠. 그래서 제가 새옷을 입고 싶어 패션비즈니스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부터 철저하게 검소한 생활을 하셨으니 뭐라 말도 못했죠. 아버지가 입다 만 낡은 속옷을 입으셨고, 나중에는 시장에서 천을 사다가 직접 만들어서 입었으니까요. 이런 건 괜찮은데 제가 사업을 할 때도 어머니는 수영복까지 마치 흥부 수영복처럼 여기저기 꿰매어서 입고 다니셨죠.”

여귀옥 권사의 검소한 생활태도는 두고두고 많은 이들에게 큰 가르침으로 남았다.
여귀옥 권사로부터 장학금을 받고 공부한 한 목회자는 이렇게 고백했다.
“권사님을 보면서 부자들에 대한 생각을 달리하였습니다. 전에는 부자들은 그저 여윳돈으로 구제하는 것이라 여겼는데, 그렇게 생활하며 아낀 돈으로 내가 학교를 다녔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지더라구요.”
아들 김영훈 회장(대성그룹)의 고백이다.
“어머니는 한 번도 악인의 꾀를 좇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신 분입니다. 죄인의 길에 서신 걸 본 적이 없습니다. 죄를 통해 무엇을 이루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은 분입니다. 저는 그런 어머니를 통해 우리 가운데 임한 하나님나라를 보았고, 하나님나라의 삶을 살았습니다.”


박명철 기자






여귀옥 여사의 삶과 신앙을 담은 다큐멘터리 <사랑은 오래 참고>

제작사 퓨어웨이 픽처스
각본 감독 권순도
시간 53분
비매품


▶이 다큐멘터리는?
재연이 더해진 이 작품은 가난한 가정으로 시집간 한 여성이 하나님 말씀에 의지하여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 과정을 세밀하고 흥미롭게 보여 준다. 사업가의 아내, 절제와 나눔의 어머니로 많은 믿음의 자녀들을 양육하고 사회정화 운동에 앞장섰던 여귀옥 권사의 순교신앙을 엿볼 수 있다. 믿음으로 자녀를 키우고 가진 것을 나누며 베푸는 삶이 얼마나 이 세상에 긍정적인 변화를 이끄는지 알 수 있다.
권수도 감독은 2009년 서울기독교영화제 기독영화인상 수상했으며, 주기철 목사의 삶을 다룬 <그의 선택> 주 목사의 다큐멘터리 <아들의 고백> 이기풍 목사의 <탐라의 그루터기> 손양원 목사의 <사랑의 사도> 문준경 전도사의 삶을 다룬 <남도의 백합화> 등의 작품을 제작했다.

▶상영 및 DVD 제공 문의?
02-754-1707(한국기독교여자절제회) 또는 영화사(070-8880-5167)

http://www.iwithjesus.com/news/articleView.html?idxno=3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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